어려서부터 기개(氣槪)가 뛰어나셨고 성리학(性理學)에 마음을 쓰시어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이 칭찬하기를 「그의 독실한 행실과 학문은 나도 따를 수 없다」고 하였다. 병자년 단종복위(端宗復位) 운동이 발각되어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아버지 죽촌공(竹村公)의 가르침에 따라 부자(父子)가 같이 순절(殉節)하셨다. 자세한 사적은 『노릉지(魯陵誌)』·『동학사초혼기(東鶴寺招魂記)』·『해동충의록(海東忠義錄)』등의 책에 보인다. 세조(世祖) 戊寅(一四五八)에 임금이 동학사(東鶴寺)에 머물면서 병자년에 억울하게 죽은 충신(忠臣)들의 이름을 써 내려주면서 전답을 하사하시고 인하여 초혼(招魂)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초혼각(招魂閣)에 부자(父子)가 함께 배향(配享)되셨다.정조(正祖) 己亥(一七七九)에 겸천서원(謙川書院)에 배향할 것을 명하시고 辛亥(一七九一)에는 장릉(莊陵:端宗의 陵) 별단(別壇)에 배향되었으며 기미년에는 동몽교관(童蒙敎官) 조봉대부(朝奉大夫)를 추증(追贈)하였다. 고종(高宗) 甲辰(一九0四)에는 숙모전(肅慕殿)에 판액(板額:懸板)을 내려 공은 전정(殿庭) 서쪽 채에 모셔졌다. 그리고 임금이 전교(傳敎)하시기를 「조숭문 부자의 충성(忠誠)과 절의(節義)는 성삼문 부자와 마찬가지이다」라고 하셨다. 또『홍재전서(弘齋全書:正祖 임금의 文集)』에는「조숭문 부자가 서로 마주보고 울었으니 그 충절은 성삼문 부자와 같다」라고 되어 있다. 墓전하지 않아서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곡성군 죽곡면(竹谷面) 봉정리(鳳亭里) 산수동(山水洞) 해좌(亥坐)에 초혼(招魂)하여 단(壇)을 만들어 해마다 한번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 단비(壇碑)는 술암(述菴) 송재성(宋在晟)이 지었다.配영인(令人) 竹山朴氏(죽산박씨) 생졸 연대(生卒年代) 미상(未詳) 墓부좌(?超埰?) 父군수(郡守) 박홍문(朴弘文) 祖정랑(正郞) 박섬(朴贍) 曾祖대사헌(大司憲) 박중의(朴仲宜) 문충공(文忠公) 박덕룡(朴德龍)의 후손 外祖전주(全州) 최집(崔?苧?)